당대 최고가의 개런티를 받던 ‘후기 8명창’의 한사람
김세종(金世宗)은 신재효(申在孝)와 함께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이론가이자, 오늘날 보성소리 계열로 전승되는《춘향가》의 형식을 체계화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디 무가(巫家) 계열 소리꾼 집안 출신인 김세종은, 어려서부터 익힌 동편제 판소리를 발전시켜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라도 감영에서 1885년 벌인 잔치의 회계기록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에는 공연에 참여한 명창들의 당시 몸값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편제 명창으로 이름난 이날치(李捺致), 김세종의 제자 장자백(張子伯) 등은 50냥을 받았고 김세종은 그 두 배인 100냥을 받았다. 17세기 기준 서울 사대문 안의 기와집 한 채가 150냥이었다고 하니, 당백전 발행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김세종 당대(19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100냥의 몸값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후기 8명창’으로 함께 손꼽히는 이날치, 장자백 등과 비교해도 그의 위상과 인기가 그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가의 개런티를 받던 ‘후기 8명창’의 한사람
김세종(金世宗)은 신재효(申在孝)와 함께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이론가이자, 오늘날 보성소리 계열로 전승되는《춘향가》의 형식을 체계화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디 무가(巫家) 계열 소리꾼 집안 출신인 김세종은, 어려서부터 익힌 동편제 판소리를 발전시켜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라도 감영에서 1885년 벌인 잔치의 회계기록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에는 공연에 참여한 명창들의 당시 몸값이 기록되어 있는데, 서편제 명창으로 이름난 이날치(李捺致), 김세종의 제자 장자백(張子伯) 등은 50냥을 받았고 김세종은 그 두 배인 100냥을 받았다. 17세기 기준 서울 사대문 안의 기와집 한 채가 150냥이었다고 하니, 당백전 발행 이후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김세종 당대(19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100냥의 몸값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후기 8명창’으로 함께 손꼽히는 이날치, 장자백 등과 비교해도 그의 위상과 인기가 그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다.